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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가라테의 한국적 변용(變容)이 태권도’라고 주장하는 사실주의 학풍을 토대로  서술하지 않는다. 다만 태권도를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간주하며, 우리나라의 모든 맨손무예를 태권도와 동일하게 해석하는 전통주의 (국수주의)학풍의 맹점을 비판한다.
불교 유산인 금강역사의 자세와 동작을 1960년대 후반 태권도 동작과 품새에 이입(移入)·이식(移植)해 놓고,  태권도와 결부시키는 오류는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태권도 학계가 지향해야 할 태권도 학문의 정직성이다.
# 들어가면서 : 도발적인 의문 제기

경북 경주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국보 제24호)은 751년 김대성이 창건했다. 석굴암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 종교를 떠나 예술의 완성과 조형물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석굴암 본존불을 지키고 있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vajrapani)에 주목한다. 금강역사의 형상은 태권도와 관련이 있는 동작일까? 아니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헬라클레스가 불교와 습합(習合)·변용(變容)되면서 생겨난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유형일까?

지난 50년 동안 태권도 학계는 금강역사의 자세와 동작은 오늘날 태권도 동작과 매우 흡사하다며 태권도 역사에 포함했다.

국기원 세계태권도연수원(WTA)이 출간한 『3급 태권도지도자연수 교재』(2015) <태권도 역사> 을 보면, “금강역사상의 주먹모양은 현재 태권도의 바른 주먹과 매우 유사하고, 그 밑의 손 모양 역시 현재 태권도의 편 주먹과 매우 흡사…”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매우 유사’, ‘매우 흡사’하다는 것은 ‘비슷하다’는 표현을 뛰어넘어 ‘같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이 같은 논리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를 태권도와 밀접하다고 연관시키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대한태권도협회가 1971년 발간한 『태권도』 창간호를 보면, “무용총 벽화는 오늘날 태권도의 형과 너무 흡사하게 두 사람이 겨루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바로 고구려 시대에 이미 태권도가 널리 보급되었음은 물론…”이라는 문장은 금강역사상을 태권도와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과연 그럴까? 이러한 주장과 논리는 사실(fact)에 바탕을 둔 보편타당한 논거일까? 이 글은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태권도의 고유성과 전통성을 강조하며 자민족중심주의로 태권도 기원을 바라보고 있는 ‘전통주의 학풍(傳統主義 學風)’은 고구려 무용총 벽화와 통일신라 금강역사상을 태권도와 결부시키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모든 맨손무예를 태권도에 포함시키는 일반화의 오류와 폐쇄적 필연화를 범하고 있다.

이제 고구려 무용총 벽화와 통일신라 석굴암 금강역사상을 그럴싸한 허구의 논거로 태권도에 우겨 넣으려는 관점은 바로 잡아야 한다.

경주 석굴암. 주실에 있는 본존불로 들어가는 입구 좌우에 금강역사상이 있다.

석굴암 금강역사상을 태권도와 연관지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말이 아닌 글로 쓴 사람은 드물다.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1990)에서 김용옥 학자가 “금강역사가 태권도의 막기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등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오류를 반복해선 안 된다”고 설파한 것이 눈에 띌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사실성과 논거가 부실한 ‘전통주의 학풍’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적 측면에서 금강역사상과 태권도의 연관성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오류를 비판하고자 한다. 아울러 자민족중심주의의 폐쇄적인 전통 논리에 머물고 있는 태권도 역사를 수평적 보편주의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촉진제가 되기를 바란다.

# 헤라클레스와 금강역사의 유래

불상(佛像)은 부처의 가르침을 기초로 불교 교리에 따라 부처의 얼굴과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조각상이다.  본래 붓다는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초창기 불교에서는 불상이 없었지만 그리스 문명의 조각상 영향을 받아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최준식 교수(이화여대 한국학과)는 『불교문화 이해의 첫걸음』(2010)에서 “인도 서북부 간다라 지방의 불교도들은 제우스나 헤라클레스 같은 그리스 신들의 성스러운 상((image)을 보고 붓다를 상(image)을 만든 것이다. 눈으로 보고 기도할 수 있는 상(像·image)이 존재할 경우 종교적인 효과가 더 극대화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그 후 불상은 불교 전파에 따라 북으로는 동서무역의 길목이었던 서역을 거쳐 중국과 한반도, 일본에 전래됐다.

372년 고구려에 들어온 불교는 대부분 암벽에 부조(浮彫)로 표현된 불상을 만들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외래 양식을 수용해 사원을 건축하고 불상을 만들면서 통일신라만의 토착적인 신앙과 창의적인 예술의 기교가 가미되면서 발전했다. 그것의 백미가 바로 석굴암이다.

기원전 1세기 인도 서북부 간다리 불교미술 조각상. 부처(붓다)를 옆에서 지키고 있는 헤라클레스

석굴암에 있는 금강역사도 이러한 문화 전파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주로 불교와 관련된 탑과 사찰의 입구에 있는 금강역사는 1세기 인도 간다라 불교문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간다라 불상 조작에 새겨진 금강역사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와 같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임영애 학자는 “금강역사는 ‘바즈라(Vajra)를 든 자’라고 하며, ‘집금강신(執金剛神)’이라고 한다”며 “불타의 출성(出城)부터 열반 장면을 묘사한 열반도에 이르기까지 불타의 전 생애에 걸쳐 금강역사가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헤라클레스가 불교의 수문장(守門將) 또는 신장(神將)으로 변모했다는 신재관 교수(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심 교수가 2009년 4월에 발표한 ‘헤라클레스, 인드라 그리고 바즈라빠니 재고찰’ 논문의 핵심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가 금강역사의 원류로, 페르시아와 인도, 서역지역까지 폭넓게 영향을 줬고, 한반도로 들어와 통일신라에도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각종 연구와 문헌을 살펴보면 동양에서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1∼2세기에 제작된 간다라 불상 조각이다. 부처의 수행원인 금강역사는 ‘제우스의 벼락을 든 헤라클레스’ 형상과 닮았다.

불교문화가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사자머리 투구를 쓴 헤라클레스가 불법의 수호자로 등장한다. 17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 감숙성 맥적산 석굴(麥積山 石窟)에는 수많은 부처의 불상과 제자, 보살들이 진흙으로 조소(彫塑)되어 있다. 그 안에 금강역사는 우람한 체구에 불거져 나온 눈동자 모습으로 금강저(Vajra)를 움켜쥐고 있다. 중국 낙양 용문석굴에 있는 금강역사도 부처를 지키는 수문장처럼 서 있다.

중국 낙양 용문석굴 금강역사상(왼쪽)와 맥적산석굴 금강역사상

인도와 중국에서 주로 보이는 금강역사는 강한 금강(金剛)으로 만든 고대 인도의 무기인 금강저를 쥐고 있다. 이것은 강한 불교 수호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처럼 고대국가 시대에 유럽-아랍·인도-중국-한반도-일본으로 연결된 ‘문화 교류·융합 코드’는 여러 문헌과 연구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신라로 넘어온 헤라클레스, 금강역사·사천왕으로 변신’이라는 제목의 기사(서울신문, 2012, 4, 10)는 눈여겨 볼만하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거쳐 10세기 이후 조형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 금강역사상. 사납고 근육이 사실적이다.
# 석굴암 금강역사상의 특징

금강역사는 석굴암의 주실(主室)로 들어가는 입구의 왼쪽과 오른쪽에 2구가 쌍(雙)을 이룬다. 왼쪽에 있는 1구는 입을 연 ‘아상’이고, 오른쪽에 있는 1구는 입을 다문 ‘훔상’으로, 모두 본존불 근처에 사악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수호하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이다. 비슷한 시기에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1층 탑신부에 문을 만들고 문 양 옆에 인왕, 즉 금강역사를 배치했는데, 이것도 불법을 수호하는 수문신장이다.

불교의 교화 방편 중에 섭수(攝受)는 자비로 교화하는 것이고, 절복(折伏)은 상대방을 꺾고 항복을 받아 교화하는 것인데, 석굴암 금강역사상 중 입을 다문 ‘훔상(밀적금강)’은 섭수를 상징하고, 입을 벌리고 공격하는 ‘아상’(나라연금강)은 절복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금강역사의 전체적인 형상을 보자. 한 손은 허리 쪽으로 내리고, 다른 손은 주먹을 움켜쥐고 공격하는 듯하다. 맨손에 웃옷을 벗고 우람한 근육질을 과시하며 옷자락은 흩날리는 등 진중하지만 악의(惡意)는 없어 보인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금강역사상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중국과 일본의 금강역사상이 사납고 공포감을 갖게 하지만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순박하면서도 진중한 느낌이 많다.

금강역사상은 지금도 사찰의 입구에 있는 일주문 등에 사악한 무리를 막는 수문장처럼 있다. 부산 범어사에 있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경남 밀양 무봉사에 있는 금강역사상이 대표적이다. 불교계에선 금강역사가 시대 흐름에 따라 사천왕으로 변모했다고 보고 있다.

부산 범어사 금강역사상(왼쪽)과 밀양 무봉사 금강역사상
# 결론과 제언 : 금강역사는 불교유산, 태권도가 아니다

태권도 금강 품새에 있는 ‘금강 막기’는 금강역사의 형상에서 그 자세와 동작을 따와서 만든 동작이다. 상대방이 얼굴과 몸통 또는 아래를 공격해 오면 오른손은 주먹을 움켜쥐고 얼굴 부위의 막고, 왼손은 주먹을 펴서 내려막거나 몸통을 바깥 막는 동작이다. 이 동작이 금강 바깥 막기, 손날 금강 막기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금강역사의 자세와 동작을 태권도 학계는 어떻게 해석할까? 2015년 국기원 세계태권도연수원(WTA)가 출간한 『3급 태권도지도자연수 교재』 <태권도 역사>를 보면, “금강역사상은 오늘날 태권도의 공격과 방어의 뚜렷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며 “금강역사상의 주먹모양은 현재의 태권도의 바른 주먹과 매우 흡사하고, 그 밑의 손 모양 역시 현재의 편 주먹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 문장의 속뜻은 금강역사상이 태권도와 같다는 의미로 읽힌다.

석굴암 금강역사상(왼쪽)과 금강역사의 자세와 동작을 모방한 금강 막기

금강역사의 자세와 동작은 통일신라 무인들이 행했던 맨손 무예(격투술)이거나 기본동작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 통일신라 사람들이 순간적인 위력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장법(掌法)과 평소 단련한 주먹과 맨손으로 상대방을 공격했던 자세와 동작이 금강역사에 이입(移入)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중국·한국·일본 등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맨손 무예가 금강역사에 투영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추측과 주장은 이제 ‘정설(正說)’이 되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추측과 가정을 뒷받침할만한 정확한 사실과 논리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문화인류학적 측면에서 금강역사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영향을 받아 동아시아 불법 수문장의 보편적인 동작과 특징을 지니고 있다. 금강저를 들고 있든 들고 있지 않던 간에 사악한 잡신을 물리치는 근육질의 우람한 금강역사는 헤라클레스에서 비롯됐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석굴암 금강역사는 중국의 금강역사처럼 금강저를 손에 움켜쥐고 있는 형상에서 벗어나 통일신라 불교의 신앙적 요소와 토양에 맞게 맨주먹을 움켜쥐고 본존불을 지키는 수문장신으로 변모했고, 일본으로 건너간 금강역사는 일본의 신앙에 맞게 발전했다.

금강역사는 불교와 관련된 유산이다. 따라서 더 이상 태권도와 결부시키지 말아야 한다. 만약 금강역사와 비슷한 자세와 동작을 하고 있는 형상(形相)이 중국과 티베트,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등 불교가 융성했던 나라에서 발견되고, 그것이 태권도의 원류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부정확한 사실과 부실한 추측으로 금강역사의 자세와 동작을 태권도 역사에 편입시켜 태권도의 기원과 유래를 고대국가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순은 태권도 역사의 폐쇄성과 고립성을 가져올 뿐이다.

이 글은 ‘가라테의 한국적 변용(變容)이 태권도’라고 주장하는 사실주의 학풍을 토대로 서술하지 않는다. 다만 태권도를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간주하며, 우리나라의 모든 맨손무예를 태권도와 동일하게 해석하는 전통주의 학풍의 맹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불교 유산인 금강역사의 자세와 동작을 1960년대 후반 태권도 동작과 품새에 이입(移入)·이식(移植)해 놓고, 마치 그것이 정설인 듯 태권도와 결부시키는 오류는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태권도 학계가 지향해야 할 태권도 학문의 정직성이다.

이 글이 태권도의 기원과 유래 등 태권도 역사서술의 정직성을 촉진하기를 바라며, 심층적인 논의는 앞으로 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서성원 기자>

태권박스미디어 편집장, 국기원 연수원 이론 교수, 태권도전문기자회 초대회장, 전 국기원 홍보과장, 전 태권도신문 기자, 전 무신미디어 편집인, 전 태권저널 편집인, 전 태권라인미디어 편집인, [태권도뎐] 저자, [태권도역사와 문화의 이해] 저자, [외길 70년, 현대 태권도의 기틀을 다진, 엄운규] 공동저자, [태권도를 세우고 세계를 호령하다, 김운용] 공동저자, [아프리카에 태권도의 혼을 심다, 김영태] 저자

10 COMMENTS

  1. 아주 좋은 연구발표라 판단합니다.
    동감합니다.
    태권도가 무협소설 처럼변화지 않도록 좋은 연구들이 많이 발표되길 기대합니다

  2.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는 것 처럼 태권도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다음세대에게 정말 필요한 메세지를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의 태권도 즉 한국 무술의 역사는 불교문화가 한국에 전해지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고 널리 통용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서기자님의 글처럼 불상이 만들어 진 것은 그리이스의 영향이고 그 영향으로 불상이 만들어지고 보이지 않는 곳이 기대여 기도하는 것 보다 보이는 대상에 기도하고픈 인간의 마음이 함께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중국의 무술이 오래 전부터 존재 해왔는데 그 무술이 도교사상과 만나면서 무도의 철학이 덧입혀졌고 더욱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림사의 무술역시도 달마의 운동요법이 소림사에 숨어든 무인들을 만나 무술로 거듭났고, 우리의 전통 무술이 일본의 강점기 시절에 가라데와 만나 태권도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재 탄생을 했습니다.
    사담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제가 강의하던 대학에서 교수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옆자리에 앉았던 교수님과 이야기 하던 중에 내가 태권도사범이라는 것을 알고 동양무술에 대하여 약간의 비웃는 듯한 느낌을 받아 그분과 시간을 만들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의 말은 무술이 동양에서 왔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을 하는데 그리이스와 아프리카의 무술이 더 오랜 역사와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4천년이 넘는 역사적 자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근거가 부족합니다. 그리이스의 무술, 레슬링, 권투, 판크레시온등은 이미 4천년이 넘은 시절부터 있어 왔던 무술이고 이미 입증이 된 무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린 태권도가 우리의 정통성을 가진 무술이고, 일본의 영향이 없다느니, 중국의 무술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그러한 내용은 별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스포츠 역사를 전공하신 분의 이야기를 듣고 세계각국의 무술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리이스와 이집트에는 이미 4천년 전의 무술이 널리 통용이 되었다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 브라질, 필리핀등등의 나라는 전통 춤이나 관습이 변하여 그리고 타 무술을 받아 자신들의 무술의 형태로 발전 된 것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내에서는 이스라엘의 무술이(크라브 메가/Krav Maga) 한동안 성행하기도 했습니다. 실전 무술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본토에서는 그 무술이 무술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재 정립하고 바로 잡아가는 것이 한국무술과 태권도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서기자님의 글에서 말한대로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합니다. 고구려의 각저총의 씨름과 겨루기 자세, 금강역사(무용총의 벽화는 태권도의 무술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를 되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강역사를 잘 살펴보면 재미난 모습이 있습니다. 다른 금강역사상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 불국사 금강역사에는 있습니다. 왼쪽에 입을 연 아상과 오른쪽에 입을 다문 훔상입니다. 이것이 설령 석굴암을 만든 김대성이 무술을 상징하는 의도로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무술의 기본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해도 손색이 없는 중요한 두 부분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우리가 어릴적 화가 나면 “으이 씨~” 하면서 한 손이 때릴 준비를 하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다른 손은 자연스럽게 바탕손 처럼 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 동작이 입을 다문 ‘훔’상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어린 아이가 상대의 공격이 두려우면 가장 먼저 취하는 동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립니다. 그리고 다른 손은 배나 하반신을 가립니다. 그 동작은 ‘아’상의 막기 동작입니다. 저는 불교신자는 아닙니다. 도리어 기독교신자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역사적 흔적속에서 무술의 기본을 찾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억거지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각저총에 씨름을 하는 모습이나 겨루기 자세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모습에서 한국인의 모습보다는 도리어 중동지역 사람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 할 때, 태권도의 전통과 정통을 이야기 할 때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태권도인들이 좀 더 역사와 각 동작의 연관성을 찾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한국의 무술이 세계에서 확고한 자리메김을 하려면 학술적으로도 확고한 이론과 역사관이 만들어 져야 합니다. 현재까지는 그런것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다보니 각 단체 각 기관이 말하는 역사관과 정의에 통일성이 없고 또한 부족합니다.
    우리가 더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설득력있는 근거를 만들어 두고 설명을 할 수 있어서, 우리의 주장이 올바르고 과학적이라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글을 쓰다보니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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